토픽 회사생활

공개입찰 탈락한거 봤던 경험...

펍지 · q*********
작성일2020.04.14. 조회수3,271 댓글33

벌써 한 10년이 훌쩍 넘은 얘기가 되었네.

사회 초년생으로 다닌 첫 회사에서 수십억 정도 되는 규모의 장비 수주 업무를 맡았다.

우리가 구매하는 쪽이라 소위 말하는 갑 이어서 여러 경쟁 업체들이 들어왔었다.

기술영업 하시는 분들이 들어와서 거의 6개월 정도를 그분들과 같이 출근해서 퇴근하는 생활을 하다보니 회사 일 이지만 인간적으로 더 정이 가는 분들이 계셨다.

그때 들어왔던 회사가 지금은 망한 그 당시 중소기업 L모사 및 몇개 군소 업체, LG 계열사, 그리고 삼성 계열사였다.

L 모 사를 비롯한 몇몇 중소기업은 재무구조가 그 당시 너무 불건전해 1차에서 탈락 통보를 보냈고 그 회사에서 기술영업 들어오신 분도 그럴줄 알았다는 듯 쿨하게 복귀 하셨다.

LG 계열사에서 오신 분은 인하대 공대 출신에 키가 크고 마르신 분 이었는데 사람됨이 진실되고 매사에 품격이 있었다. 더불어 영업을 할때도 과장됨이 없이 솔직하게 이런 부분은 좋고 이런 부분은 부족하다, 이런 부분은 외주 업체가 들어와서 DB 마이닝을 해야한다며 영업 외적인 부분이며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까지 많이 알려주셨다. (문송한 문돌이라 잘 모르는게 많았는데 이 분이 버스 태워주셔서 렙업이 빠를 수 있었다)

삼성 계열사에서 오신 분은 LG 계열사에서 오신 분과는 차이가 좀 있었다.

인간적으로 나쁜분은 아니었으나 영업 스타일이 달랐다.

LG 계열사분이 선비라면, 삼성에서 오신분은 뭐랄까... 파락호 같은 이미지였다. 술 좋아하고 접대 좋아하시는... 당시 프로젝트를 같이 하신 우리쪽 팀장님이 삼성과 같은 대기업인 롯데 출신이라 이분들하고 말이 잘 통하셨는데 삼성에서 오신 담당자분은 '무조건 실무를 잘 챙겨야 한다'며 팀장님과 나를 비롯한 프로젝트 팀원들에게 접대를 극진하게 했다.

이 분 덕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룸싸롱에 가보기도 했다.

물론 나 같은 말단 팀원 조직을 데리고 가는 곳이니 최고급은 아니었겠지만 내 눈엔 완전 다른 세계였다. (아는게 없어서 정말 술만 마셨다...)

이 분 역시 기술 영업 하시는 분이니 기본 가락은 있으셔셔 제품이나 개발 설명하실땐 눈이 반짝이며 광채를 발했다. 한양대 공대 출신이라고 하셨는데 이 분은 특이하게 장비 매뉴얼을 거의 달달 외우고 계셨다. 스펙에 대해서 물어보면 1초안에 거의 10여 페이지에 달하는 정보를 쏟아내 주셨다.

솔직히 두 분의 기술영업에 대한 지식의 차이는 대동소이 했을것이다. 스펙 검증차 상대방이 제시한 장비를 서로 교차 문의 했을때 돌아온 답이 기대했던 답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정말 순수하게 객관적으로 따지자면 LG 쪽에서 제시한 장비 구성이 어디로보나 삼성쪽이 제시한 장비보다 성능이 좋았다. (물론 가격도 LG쪽이 몇억 정도 더 저렴했다)

게다가 기술 영업 하시는 분의 태도나 인성, 실제로 그 분 회사 투어를 가서 개발 담당 직원분들과 인터뷰도 진행해보니 점점 더 확신이 들었다.

내심 LG 쪽을 점찍고 보니 다른 팀원이나 팀장님 까지도 비슷한 생각이라 큰 대과가 없으면 LG 쪽에서 가져가는게 확실했다.

문제는 경영진의 의사인데... 사실 합리적이기 이루 말할수 없는 IT 회사였기 때문에 그 부분도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분위기를 눈치챈 것인지 삼성쪽에서 공개 장비 테스트를 진행하자고 했다.

이미 어느정도 결정이 난 상태에서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지만 팀장님은 '심증을 확신으로 바꿀수 있는 좋은 기회이며 경영진도 우리가 내린 판단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 라고 생각한다며 진행하자고 했다.

준비 기간은 2주일.

결전의 그날까지 1주일이 남으면서부터 시연 장소로 지정된 회의실에 칸막이를 치고 두 회사가 장비를 가지고 들어와서 시연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경영진들을 모두 초빙해 시연을 보여드리고자 했고 이 시연을 통해 우리 의사 결정에 힘을 싣고자 했다.

결전의 날이 마침내 다가오고 시연이 펼쳐졌다.

초대하지도 않은 그룹사 회장이 (우리는 사장 까지만 초대 했었다) '지나가다 들렀어요' 라며 들어와서 시연을 보게 되어서 부담감은 더 커졌다.

아마 시연을 준비하는 그 두분의 영업담당 분들도 같은 부담감이 있었을 것이다.

LG 의 선공으로 시작한 시연은 별 다른 문제없이 제안한 기능을 모두 성공적으로 마무리 하며 DB 적재 및 경쟁사 대비 더 미려한 UI/UX 로 좌중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줬다.

삼성의 차례,

별 탈 없이 진행되던 시연중간, 갑자기 DB 에 데이터가 올바르게 쌓이지 못하고 장비가 모두 재부팅 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지금도 이유는 (문돌이라) 잘 모르겠지만 시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뭔가 코딩이 잘못된게 아닌가 싶었고, 대여섯번의 재시도 기회를 주었지만 삼성측은 결국,

"오늘 다 보여드리지 못한 부분은 저희가 완성해서 메일로 처리 결과를 금주까지 송부해 드리겠습니다 "

라고 마무리 하여, LG 의 압승으로 끝이 났다.

시연 결과까지 포함해서 전체적인 업체 선정 결과 보고서를 만들어 경영진까지 올리고 업체 선정 결과 발표가 나기 1주일전쯤 각자 업체에서 담당자분들이 차례대로 인사를 하러 오셨다.

공히 식사를 같이하고 작은 기념품을 주셨는데, LG는 작은 손톱깎기 셋트가 들어있는 상자를 주셨고 삼성은 파버 카스텔 볼펜 셋트를 주셨다.

속으로

'아이고 탈락하실텐데 이런거 받아도 되나...'

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봐왔던 그분의 어떤 미소보다 환한 미소를 보이시며 나에게 말씀 하셨다.

"XX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결과 나오면 결과와 상관없이 또 인사 드리러 오겠습니다만, 어쨌든 고생 많이 하셨고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음?

'나는 저분이 배울 건덕지가 없는 문송한 문돌이인데...?'

'저 분이 나보다 사회 경력이 모르긴 몰라도 15년은 더 많으실거고 만약 같은 회사 였으면 같이 점심 먹기도 힘든 높은 분인데 저 분이 저런 말을...?'

물론 그 분의 그 말은 영업 프로페셔널의 영업 마인드 였겠지만 그 분에 비해 깜도 안되는 상대 업체 말단 직원에게 까지 공치사를 해주시는 모습은 색다른(?) 배움을 주었었다.

얼마 후, 팀장님은 최종 선정 결과를 우리에게 알려 주셨는데, 놀랍게도 삼성 계열사가 선정 되었다고 했다.

"어... 안타깝게도 이번엔 우리 의지와는 다르게 그렇게 되었어. 이해해라"

같이 실무를 담당했던 나와 다른 팀원들은 밖으로 나와서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라며 분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때 LG쪽 담당자분이 들어오시는 것이 보였다. 나와 일행은 당황해서 말도 못하고 일순간 얼어 붙었는데 그 당황스러움은 탈락 사실을 그 분께 우리가 얼굴을 보면서 말해야 한다는 어색한 상황이 가져올 민망함에 그랬던 것이었을 것이다.

그 분이 우리를 보며 밝게 웃으며 먼저 말을 시작했다.

"결과 나왔죠?"

"네... 네에..."

일순간 어색한 정적이 우리를 휘감는 것이 느껴졌고 정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상황이 펼쳐지려는 순간,

"네, 얘기 들었어요. 우리 안됐더라구요 허허!"

나는 어안이 벙벙해진채로 그 분을 바라보고 있었다.

"준비한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뭔가 부족했나봐요. 아쉽지만 어쩔수 없죠 뭐"

어색했다.

자연스럽지 못했다.

그 분의 너털 웃음을 듣는 나는 어색했고 자연스럽지 못했다. 이 분은 마치 '뭐, 별일이라고?' 하는 듯이 오히려 우리들을 달래듯이 이야기했다.

"물론 우리가 제안한 제품이 더 좋지만 삼성쪽도 업계에서는 알아주는 제품들로 구성이 되어 있으니까 안정성은 나쁘지 않을거예요"

"밥 이라도 같이 먹으면서 얘기 좀 더 하면 좋겠는데, 결과 나와서 나도 회사에 보고서를 올려야 해서 다음에 같이 다시 보기로 해요. 고생 많이 했고 수고했어요!"

어안이 벙벙한 채로 있던 나는 팀장님의 "회사다니다 보면 이럴 때도 있어" 라는 말을 들으며 사회가 내 생각과 의지, 그리고 정직함 만으로는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새롭게 배우고 있었다.

더불어,

나이가 10년 이상은 어린 상대방 말단 직원에게까지 '잘 배웠다'라며 고개를 숙이던 삼성에서 오신 그 기술 영업 담당자 분과,

공들인 입찰에서 패하고도 '허허' 웃으며 오히려 우리를 투닥 거리던 LG 측 기술 영업 담당자분께

당시 어린 나이였던 사회 초년생 문돌이가 이제는 중년의 나이가 되어 그 당시 큰 가르침을 주신 그 두분을 가끔 생각하며 직장 동료들에게 같은 여유로움과 겸손함을 보여줄수 있는 사람이 되었는지 되묻고 있다는 점을 말해주고 싶어서, 힘들게 핸드폰으로 몇자 적어 본다.

그 때 두분, 아직 잘 지내고 계시죠?

PS. 치킨집 차리셨으면 한번 찾아가 뵙겠습니다.

댓글 33

한국수력원자력 · e*****

담백하고 따뜻한 마음이 담긴 후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펍지 · q********* 작성자

읽어주셔서 제가 감사 드립니다

메리츠종금증권 · 메******

되게좋은글이다
글구 쓰니 문돌이라더니 글쓰는 재주있음

펍지 · q********* 작성자

감사함다. 소싯적에 연애편지좀 썼음다

현대트랜시스 · i*********

정성들여 써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펍지 · q********* 작성자

감사함다 형님!

OCI · 날****

글 잘쓰신다 필력 좋으시네요

펍지 · q********* 작성자

소싯적에 구라좀 쳤슴다!

대림산업 · G*****

와 잘 읽었습니다. 글 자주 써주세요!

펍지 · q********* 작성자

글 쓸 꺼리가 별로 없어요 ^^

스타트업 · !*******

ㅇㄷ

공무원 · 물****

글 진짜 잘 썼다

펍지 · q********* 작성자

감사 감사~

현대제철 · i*********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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