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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146년 인종 24년

대구교통공사 · 포********

정월 무술일(1월 28일),

염경애

라는 고려의 한 여인이 숨을 거두었다.

최루백(崔婁伯, ? ~ 1205)의 와이프였다.

순천원(順天院)에 빈소를 마련하였다가

2월 임인일에 개경 북쪽 박혈(朴穴)의 서북쪽 산등성이에서 화장하였다.

유골을 봉하여 임시로 도성 동쪽에 있는 청량사(淸凉寺)에 모셔두었다가,

3년이 되는 무진년(의종 2, 1148) 8월 17일에 인효원(因孝院) 동북쪽에 장례 지내니, 아내의 아버지 묘소 곁이다.

남편 루백이 다음과 같이 묘지(墓誌)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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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이름은 경애(瓊愛)로 검교상서 우복야 대부소경(檢校尙書右僕射 大府少卿) 염덕방(廉德方)의 딸이고, 어머니는 의령군대부인(宜寧郡大夫人) 심씨(沈氏)이다. 아내는 25세에 나에게 시집와서 여섯 명의 자녀를 낳았다. 장남은 단인(端仁)이고, 2남은 단의(端義)이고, 3남은 단례(端禮)인데, 모두 학문에 뜻을 두었고, 4남 단지(端智)는 출가하여 중이 되었다. 장녀 귀강(貴姜)은 흥위위녹사(興威衛錄事) 최국보(崔國輔)에게 시집갔는데 최씨가 죽자 집에 돌아와 있고, 2녀 순강(順姜)은 아직 어리다.
아내는 사람됨이 아름답고 조심스럽고 정숙하였다. 제법 문자를 알아 대의(大義)에 밝았고 말씨와 용모, 일솜씨와 행동이 남보다 뛰어났다. 출가하기 전에는 부모를 잘 섬겼고, 시집온 뒤에는 아내의 도리를 부지런히 하였으며, 어른의 뜻을 먼저 알아 그 뜻을 받들었다. 돌아가신 우리 어머님을 효성으로 봉양하였고, 친척들의 경조사를 힘써 살피니 훌륭하다고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내가 패주(貝州)와 중원(中原)의 수령으로 나갔을 때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어려움을 꺼리지 않고 함께 천 리 길을 갔으며, 내가 군사(軍事)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는 동안 가난하고 추운 규방(閨房)을 지키면서 여러 차례 군복을 지어 보내 주었다. 혹은 엄환(閹宦)에 참여하는 동안에는 있는 것 없는 것 다 털어서 음식을 만들어 보내기도 하였으니, 무릇 나를 좇아 어려움을 겪은 23년 간의 일들을 모두 적을 수가 없다.
우리 돌아가신 아버지를 섬기지 못하여 명절이나 복일(伏日)과 납일(臘日)3)이 되면 매번 몸소 제사를 드렸다. 또 일찍이 길쌈하여 이것을 모아서 저고리 한 벌이나 바지 한 벌을 지어 제삿날이 될 때마다 영위(靈位)를 모시는 자리를 마련하고 절한 다음 이것을 바쳤으며, 곧 재에 나아가 무리가 많든 적든 버선을 지어 승려들에게 시주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잊지 못할 일이다.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독서하는 분이니, 다른 일에 힘쓰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집안의 의복이나 식량을 주관하는 일을 맡았는데, 비록 여러 번 힘써 구하더라도 맘대로 되지 않은 경우가 때때로 있습니다. 설사 불행하게도 뒷날 내가 천한 목숨을 거두게 되고 그대가 후한 녹봉을 받아 모든 일이 뜻대로 되더라도, 제가 재주 없었다고 하지 마시고 가난을 막던 일은 잊지 말아 주세요”라고 하였는데, 말을 마치고는 크게 탄식을 했다.
다음 을축년(인종 23, 1145) 봄에 내가 사직(司直)에서 우정언 지제고(右正言 知制誥)로 자리를 옮기니, 아내는 얼굴에 기쁜 빛을 띠면서 말하였다. “우리의 가난이 끝나려나 봅니다.” 내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간관(諫官)은 녹봉이나 지키는 자리가 아니오.” 그러자 아내는 “혹시라도 어느 날 그대가 궁전의 섬돌에 서서 천자(天子)와 더불어 옳고 그른 것을 논쟁하게 된다면, 비록 가시나무 비녀를 꽂고 무명 치마를 입고 삼태기를 이고 살아가게 되더라도 또한 달게 여길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평범한 부녀자의 말 같지 않았다. 그 해 9월에 아내는 병이 들었는데 병인년(인종 24, 1146) 정월에 병이 위독하여 세상을 떠나니, 한(恨)이 어떠하였겠는가.
나는 병인년 여름에 우사간(右司諫)에 오르고 12월에는 좌사간(左司諫)으로 옮겼다. 정묘년(의종 1, 1147) 봄에 시어사(侍御史)로 옮겼다가 그 해 겨울에는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로 좌천되었다. 무진년(의종 2, 1148) 봄에 예부낭중(禮部郎中)으로 옮겼다가 다시 청주부사(淸州副使)에 임명되었다. 여러 번 벼슬이 오르면서 계속하여 후한 녹을 먹게 되었는데, 집안을 돌아보면 의식(衣食)은 오히려 아내가 어렵게 애써서 구할 때와 같지 못하니 누가 아내를 말하여 재주가 없었다고 하겠는가. 아내가 장차 목숨을 거두려 할 때 나에게 죽은 뒤의 일을 부탁하였고 여러 자식들에게도 유언을 남겼는데, 그 말들이 모두 이치에 닿아 들을 만한 것이 많았다. 세상을 떠날 때 나이가 47세였다.
명(銘)하여 이른다.

믿음으로써 맹세하노니, 그대를 감히 잊지 못하리라.

아직 함께 무덤에 묻히지 못하는 일이 매우 애통하도다.

아들딸들이 기러기처럼 뒤따르니

부귀가 대대로 창성할 것이로다.

🪦

서기 1146년 인종 24년 발굴된 고려 여인, 염경애의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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