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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드 보통의 연애 - 모순 가득한 현대의 남과 여

앤서스랩코리아 · c********
작성일2023.12.24. 조회수1,104 댓글3

안녕!

오랜만에 알랭드 보통의 <우리는 사랑일까?>의 한 부분을 해석해보려해!

오늘 다루게 될 부분에서 요즘 인터넷에서 서로 혐오를 표현하는 남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어.

“그리고 올랭피아의 강함이라 할 수 있는 형태가 있었다. 1865년 파리의 살롱에서 에두아르 마네의 전설적인 초상화가 처음 전시된 뒤로 생겨난 이름이다. 처음 전시되었을 때 ‘올랭피아’는 미술계에서 선풍적인 반응을 일으켰고, 곧 외설적으로 비윤리적인 작품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마네는 모델의 천박하고 부적절한 자세로 전통적인 회화 장르를 조롱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정말 비평가들의 비위를 건드린 것은 형식의 파괴가 아니라, 언급할 수는 없지만 모델인 빅토린 뫼랑의 표정이었다. 이전까지 여성 누드를 그린 (남성) 미술사 속의 모델들은 거의 언제나 유혹적이면서 온순한 자세를 취했다. 안방이나 고전적인 정원에서 여성은 나신인 채, 남자가 먼저 섹스를 시작하기를 기다리며, 요구하지는 않지만 유혹적이면서 수줍은 열다섯 살 소녀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 관객은 프로이트 이전 시대에 집착했던 순수한 의도를 품고서 위대한 미술 작품을 열심히 감상하는 외형을 띠고, 아름다운 요정을 보며 침을 흘릴 수 있었다. 이것이 티치아노가 그린 ‘우르비노의 베누스’로 대표되는 전통이었다. 젊을 때 마네도 모사한 적이 있는 이 작품 속의 여성은 온화하고 순수하면서도 관객이 원할 때는 명백히 성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남성 관객은 시선으로 그녀의 옷을 벗기고, 한가한 때에 타락케 할 수 있었다. 그녀의 취향 따위는 걱정하지 않고도.
“올랭피아는 전혀 달랐다. 수줍어 움츠린 기색 없이, 자신 있고 스스로의 욕망을 잘 아는 여성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그 일을 먼저 시작하는 사람은 남성 관객이 아닌 그녀일 것 같았다. 눈과 입에 담긴 표정으로 봐서, 그녀는 크기나 솜씨에 대해(그녀에게는 재미있고, 남자에게는 당황스럽게) 한두 마디 농담도 할 것 같았다. 에릭이 보기에 가끔 앨리스가 보여주는 강인함은 빅토린 뫼랑의 표정처럼 위협적이었다 - 하지만 이 경우는 성적인 위협이 아니라 정서적인 위협이었다. 그 남자는 앨리스가 자신의 핑계들을 벗겨버리려 들까봐, ‘우리 관계에서 뭘 원하죠?’라거나 ‘왜 사랑을 나눌 때 날 보지 않죠?’하고 물을까봐 두려웠다.”

올랭피아(Olympia)는 에두아르도 마네가 발표한 1863년 작으로써, 인상주의(Impressionism)으로 대표되는 미술적 흐름에 많은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에는 비너스의 자세를 모사한 한 백인 매춘부와 그녀 옆에서 한 흑인 노예로 보이는 여성이 수발을 드는 듯한 모습을 그려내어 엄청난 논란을 낳은 작품이었다. 목에 두른 검은 리본과 팔에 보이는 청동색 팔지는 어서 자신의 주인을 찾았으면 하는 성적 노예의 갈망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와 동시에 비너스를 떠올리게하는, 상체를 배개에 걸치고 관객을 응시하는 듯한 모습은 매혹적이면서도 타락한 것이 성스러운 것을 모사하는 듯한 불편함을 동시에 자아낸다. 이 전까지 이렇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성은 요정 또는 여신 등 성스러운 존재로 묘사되었기에 매춘부를 전면에 앞세워 누드화를 그려낸 그의 그림은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이전에 존재하던 "날 것의 아름다움은 오직 성스럽게만 표현되어야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린 것이다.

헌데 흥미로웠던 것은 이 매춘부가 아닌 다른 부분에서 관객들이 더욱 격노했다는 것이다. 이 그림에는 그녀 옆에서 시종을 드는 듯한 한 흑인 여성의 모습이 보이는데, 당시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삼고, 흑인들을 노예로 거래하던 백인들의 위선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그림의 가장자리에 있는 검은 고양이는 여성의 음부를 상징하는 듯한 모습으로 보였다고 한다. 한 마디로 종합하자면, 매춘부 여성을 거래하고 흑인을 노예로 삼는 당시 백인 주류 사회의 모순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다. 성과 인권에 대한 모순이 가득했던 당시 상황을 과장없이 생생하게 거울로 비추는 듯한 그의 그림이 당시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난 이 그림을 통해서 현대 사회에 존재하는 모순을 본다. 과거에는 인권의 모순으로 우리나라도 사농공상이라는 계급이 존재했다. 양반이 노예를 부리고, 여성은 관직에 진출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시 되었다는 것이다. 역사가 흐르고 수많은 내외부 충격을 받으면서 이러한 모순은 소수 위대한 이들의 노력으로 점점 타파되어 갔다. 이제는 흑인도 여성도 투표권을 갖고 시민권을 인정 받는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아직도 존재하는 모순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을 타파하는 과정에서 마네의 올랭피아가 받았던 비난처럼 우리사회는 계속된 저항과 대립을 겪는다. 하지만 인간의 모순적인 면모는 완벽하게 타파되지 못한다. 우리 개개인이 모순적인 모습을 계속 보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현대의 남과여 사이에 일어나는 모순은 꽤 흥미롭다.

생물학에 따르면 남성 혹은 수컷은 최대한 많은 후손을 가지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고 한다. 그 욕구가 발현되어 최대한 많은 이성과 관계를 가지고 싶어한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우리는 일부일처제를 지향하며, 이 것을 어기는 것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지탄을 받는다. 그래서 자신이 매력을 느끼는 이성의 환심을 얻으려 애를 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거절을 당하지만, 반드시 짝이 있어야만 대를 이을 수 있는 수컷의 운명을 거스를 수 없기에 자신을 받아주는 존재를 만날 때까지 이성에게 접근을 계속한다. 여성은 반대로 최대한 우수한 수컷이나 남성을 만나고 싶어한다. 남성과는 다르게 여성은 아이를 잉태해야하는 입장이며, 그 아이를 세상에 낳기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해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남성이 최대한 검증되어야한다. 이 때문에 여러 명의 남성을 지켜보면서 누가 가장 자신의 기준에 최고로 부합하는지 살핀다.

남성은 최대한 많은 이성에게 자신의 흔적을 남겨야 좋은 짝을 찾을 수 있다는 빌미로 최대한 많은 여성에게 접근한다. 각 여성이 최대한 좋은 짝을 찾으려는 본능을 알기때문에, 최대한 만나는 사람의 양을 늘려 자신과 어울리는 상대를 찾을 가능성을 높이려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실패를 겪고, 실패가 계속되다보면 자신의 현실을 저주한다. 본인의 단점을 알지 못하거나 알고 있어도 개선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본인이 아닌 본인의 환경과 자신을 계속 거부하는 여성을 저주한다. 그 와중에 계속해서 본인의 유전자를 숙주로 삼는 자들은, 숙주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댓가로 넘치는 성욕을 주체하지 못한다. 이들중 일부는 불법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이를 해결하려한다. 일부는 매춘을 통해 이를 해결하거나, 섹스 파트너를 찾는 방식을 택하기도한다. 돈으로 성을 사는 것은 불법이라고 정의되어 있어도, 본인의 숙주가 주는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한다. 섹스 파트너와 끝에 남는 것은 감정의 교류 없이 육체적인 대화만이 오가는 짜릿하지만 허무한 한 순간의 쾌락이지만, 성욕을 해소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믿음에 그런 관계를 갖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

한편포르노를 시청하거나 자위를 통해 순간적으로 느끼는 희열감에 대한 댓가로 조금 더 적은 죄책감과 현실에 대한 약간의 회의감을 감안하는 경우도 있다. 매춘의 불법성을 인지하고있고, 이를 선택했을 때 감당해야할 법적 댓가를 치루고 싶지 않은 이들이다. 타인을 성적 대상화하는 것은 분명 건강하지 못한 일이기에 이에 대해서는 약간의 죄책감을 갖지만, 혼자 있을 때 하는 행동인 경우가 많기에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것을 위안삼는 것이다.

여성은 최대한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싶어하는 욕망 때문에, 많은 남성에게 여지를 열어놓고 그 중에 확실하게 본인에게 가장 좋은 조건을 제공하는 이에게만 자신을 허락하려한다. 이를 위해서 상당히 많은 남성에게 매혹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들이 일정한 선을 넘지 못하도록 관리한다. 때론 이를 위해 소위
“여러다리”를 걸치며 여러 명의 남성을 만나기도한다. 여러명의 이성과 교제하지만 본인의 마음을 주지는 않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도덕적인 가책을 느끼는 사람들은 많은 남성들을 소개받지만 자신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면 연애관계로 발전시키는 것을 막는다. 이런 방식으로 많은 후보자들을 알아보는 댓가로 거절에 대한 미안함과 여러 만남에 대한 본인의 수고로움을 감수한다.

여기서 물욕이 조금 더 강한 이들은 여러 명의 남성들이 자신에게 제공하는 명품이나, 얼마나 좋은 식당에 데려가는지, 얼마나 자신에게 많이 표현하는지 등을 통해 상대 남성을 평가한다. 그리고 그 남성의 주변 가족은 어떠한 상태인지, 보금자리가 있는지 상당한 수입을 얻고 있는지등을 보고 그의 가치를 판단한다. 내면적으로는 나와 서로 맞춰갈 수 있는 배려심과 이해심이 있는 사람이 장기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최대한 좋은 조건의 배우자를 만나려는 욕망이 앞서 하나의 약점이라도 쉽게 용납하기 어렵다. 완벽한 상대를 찾고 싶은데, 그 누구를 만나도 꼭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점들이 한 두군데 보인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조건이 크게 부족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현미경으로 그 사람의 모자란 점을 보니 다른 점들에 비해 더 커 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잠재적으로 좋은 상대를 쉽게 떠나보낸다.

결국 매우 많은 남녀가 매우 위선적인 모습으로 살아간다. 남성은 성욕에 눈이멀어 마음에 맞는 이성친구를 사귀는데 노력하기 보다 자신의 생식기를 사용할 방법을 찾는데 힘을 쏟는다. 여성은 물욕에 눈이멀어 본인과 진정으로 미래를 만들어갈 사람보다 자신에게 부족하지 않은 물질적 환경을 마련해줄 물주를 찾는데 혈안이다. SNS를 통해 보는 화려한 외모를 가진 이를 만날거라는 희망, 혹은 그런 사람과 대화를 해 볼 수 있다는 희망으로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인터넷속 환상의 그녀에게 별풍선을 쏘아댄다. 얼마전 유럽 여행 사진을 올린 친구와, 최근에 산 명품가방 사진을 올린 친구의 인스타 계정을 보며 질투심을 느끼고, 그런 것을 제공할 수 있는 상대를 찾기 위해 결정사에 등록한다. 부유한 지역의 교회에 신자로 등록해서 그런 상대를 물색하는 노력도 마다하지 않는다. 성욕과 물욕을 본인 삶의 의미로 착각하면서 그들의 물주인 유전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인간은 동물보다 고차원적인 이성적 존재라고 말하면서도, 인간 개개인들은 짐승보다도 더 본인의 욕망에 휘둘려산다. 진정으로 그들 자신이 삶의 주인인 것인지, 그들의 욕망이 그들 삶의 주인인 것인지 묻게한다. 끊임없이 본인의 욕망을 추구하고 그것이 정당한 것이라고 믿게 만드는 현대 신자본주의 사회의 부작용인 것일까? 어느샌가 그렇게 욕망을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앉히는 것이 당연시 되다보니 그것이 문제라는 의식이 옅어지고, 아무문제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진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심리학자로 평가받는 에리히 프롬이 그의 저서 <건전한 사회(The Sane Society)>에서 제기한 ‘정상성의 병리성(pathology of normailty)'이 당연시 되고 있는 현상인 것이다.

우리 자연은 많은 것들이 “이원화(Dualization)” 되어있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이는 “기구, 조직, 문제 따위를 둘이 되게함"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밤과 낮, 밀물과 썰물, 태양과 달, 여름과 겨울 등이 있다. 밤과 낮은 하루를 이뤄 낮에는 생명체가 활동할 수 있게하고, 밤에는 그들이 충전을 위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한다. 태양은 낮에 생명체가 활동할 수 있는 에너지를 유지할 수 있게 최대한의 빛을 제공하며, 달은 휴식을 위한 어둠속에서도 생명체들이 볼일을 볼 수 있도록 최소한의 빛을 제공한다. 썰물을 통해 해수면이 낮아지면 양식업을 통해 어부들이 갯벌에서 식량을 얻을 수 있다. 반대로 바다로 나아가서 고기를 잡아야하는 어부들은 밀물을 통해 해수면이 높아지면 더 수월하게 바다로 나갈 수 있고 깊은 해수면에 사는 더 많은 종류의 물고기들을 포획할 수 있다. 여름은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에너지를 위해 년 중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따스한 기운을 만들어내고, 그것으로 온 세상은 녹색으로 뒤덮인다. 반대로 겨울은 새롭게 태어날 생명을 위해 기존의 생명들이 최대한 온전하게 죽을 수 있도록 가장 차가운 에너지를 발산한다. 세상은 이렇게 음과 양처럼 이원화되어 균형을 잡는다.

어쩌면 남성과 여성도 같은 원리이지 않을까? 이 세상에 동물도 수컷과 암컷으로 나누어진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포유류들은 남과 여가 진정으로 교류해야 비로소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탄생시킬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수컷은 먹이를 가져오고, 암컷은 알을 품는 역할을 하거나, 혹은 그 성별간의 역할이 반대로 나타나는 생명체도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그 양과 음의 기운이 만나서 하나의 생명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는 낮과 밤, 밀물과 썰물, 태양과 달이 하루를 이루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결국 인간의 성이 남과 여로 나누어진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이원화시켜 서로 균형과 조화를 찾기 위함이라고 해석된다.

그러나 이렇게 본래 “조화”와 “균형"을 표현하기 위한 것들이, 현대 사회에서는 잘못 해석되어 “갈등”과 “혐오"의 원인으로 잘못 받아들여지고 있다. 현대의 다수의 남과 여는 서로를 자신의 물주가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줄 도구 정도로만 보는 것이다. 남성은 남녀의 결합은 육체적 대화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기에, 정확하게 말하면 성욕이 가장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에 나이든 여성은 아이를 낳기 힘들다는 핑계를 만들어 동갑내기 혹은 연상의 여성을 폄하한다. 여성은 자신이 아이를 낳으면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 어렵다는 이유로 경제적으로 완벽히 갖추어지고, 단점이 없는 배우자를 찾는 자신을 합리화 시킨다. 낮이 밤이 없으면 하루를 이룰 수 없고, 여름은 겨울이 없으면 다음 해를 기약할 수 없는 것을 자연 현상을 관찰하면서 깨닫지만, 자연에 실재하는 남녀 역시 서로가 없으면 완전한 인간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다.

지금의 인간 사회역시 당시 모네가 올랭피아를 통해 표현한 위선가득한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단지 그 형태가 바뀌었을 뿐이다. 인종차별은 많이 없어졌으나, 아직도 유색인종은 세계에서 주류가 되지 못하며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부지기수다. 성차별 역시 상대적으로 많이 해소되었으나, 성욕과 물욕을 갈구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남녀의 왜곡된 욕망으로 인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모두가 이 위선적인 세상을 살면서도 자신이 바라는 것은 타당하고 아무런 도덕적 결함이 없는 것처럼 착각한다.

올랭피아의 매춘부가 관객을 바라보며 “너도 나를 원하지?”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은, “너도 어쩔 수 없는 욕망의 노예아니냐?”라는 비웃음 처럼 느껴지기도한다. 당시 관람객들은 그것 때문에 기분이 나빴던 것일까? 마치 자신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듯한 수치심을 느끼면서도, 그 것이 더러운 추악함으로 일그러진 사실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기에 그렇게 느꼈던 것은 아닐까? 위선 가득한 현대사회에서 마치 나의 못생긴 욕망을 올랭피아의 매춘부처럼 대놓고 드러내고 살면서도, 그것에 대해 점점 더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망각과 무지가 점점 더 뻔뻔해지는 사회에서 점점 그것을 인식하는 신경이 마비되는 세상에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안타까움이든다.

책에서 엘리스가 묻는 것처럼 우리는 남과 여로 이루어진 관계에서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나는 내가 사랑을 나누고픈 그/그녀를 똑바로 보고 있는가? 아니면 그/그녀의 목 아래에 걸친 화려한 금빛 목걸이나 풍만한 가슴을 보고 있는 것인가? 왠지 올랭피아의 매춘부의 눈빛이 “넌 절대로 내 눈을 볼 수 없을거야. 어차피 내 몸이나 팔지를 보고 있을테니!”라고 말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참조: https://brunch.co.kr/@freeoos/637

알랭드 보통의 연애 - 모순 가득한 현대의 남과 여

댓글 3

스타트업 · 마****

으아아 넘 길어요

새회사 · 9***

오오오오.. 대박이다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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