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픽 블라블라

1177년 명종 7년

대구교통공사 · 포********

○ 정월에 망이ㆍ망소이가 와서 항복하니, 국고의 곡식을 주고, 감찰어사 김덕강(金德剛)에게 명하여 제 고향으로 압송하도록 하였다.

○ 장군 정수필(丁守弼)을 금 나라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병부시랑 최광정(崔光廷)은 만춘절(萬春節)을 축하하게 하였다.

○ 금 나라에서 야율자원(耶律子元)을 보내 와서 생신을 축하하였다.

○ 2월에 전라주도 안찰사(全羅州道按察使)가 미륵산의 도적이 항복하였다고 보고하였다.

○ 망이 등이 다시 배반하여 가야사(伽耶寺)를 침구(侵寇)하였다.

○ 임오일에 크게 안개가 끼어, 20여 일 동안 밤낮으로 안개로 인하여 해와 달이 빛이 없었다.

○ 흥왕사(興王寺)의 중이 고변(告變)하여, “승통(僧統) 충희(冲曦)가 승도(僧徒)들과 몰래 결탁하여 찬역(簒逆)을 모의합니다." 하므로, 체포하여 국문하였더니 그것이 무고임을 알고 석방하였다.

○ 남적이 황려현(黃驪縣 경기 여주(驪州))을 침구(侵寇)하고, 또 진주(鎭州 충북 진천(鎭川))를 침구하였다.

○ 우도병마사가 가야산적(伽耶山賊)의 괴수 손청(孫淸)과 그 도당을 사로잡고 베었다. 청은 일찍이 스스로 병마사라고 일컬었다.

○ 서해도(西海道)에 도적이 일어나니, 호부원외랑 박소(朴紹)를 보내어 주ㆍ현(州縣)의 군사를 동원하여 토벌하였다.

○ 3월에 생일회사사(生日回謝使) 왕규(王珪)가 금 나라에서 돌아왔다. 규는 평장사 이지무(李之茂)의 사위인데, 지무의 아들 세연(世延)은 김보당(金甫當)의 매부로서 계사년의 난에 죽었다. 이의방이 왕규도 함께 죽이고자 하여 그의 아내를 가두고 수색하였으나, 정중부의 집에 숨어서 화를 면하였다. 그때 중부의 딸이 청상과부로 살다가 규를 보고 좋아하여 사통하니, 규가 드디어 옛 아내를 버렸다. 의방이 죽은 뒤에 복직하였더니, 이제 금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이보다 먼저, 정주(靜州) 중랑장 김순부(金純富)가 낭장 용순(用純)을 죽이려 하자 용순이 도망하여 서울에 왔다. 왕규가 돌아와 국경 안에 들어오니, 순부 등이 왕규를 귄신의 사위라고 억지로 붙잡아 두어 인질로 삼고, 용순을 벨 것을 청하여 말하기를, “공(公)의 부자는 선비의 집안인데, 이제 옛 아내를 배반하고 권세 있는 집에 붙어 혼인하여 구차하게 살기를 도모하였으니, 명분과 의리가 이미 없어졌습니다. 장차 무슨 낯으로 사대부들과 함께 조정에 서려고 합니까?" 하니, 규가 부끄러워 움츠리며 대답을 못하였다. 의주분도(義州分道) 왕도(王度)가 타일러 풀어준 덕으로 벗어났다.

○ 오광척(吳光陟)이 금 나라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진헌(進獻)한 옥대(玉帶) 중에 한 개는 바로 석종유(石鍾乳)요 옥이 아니었으므로, 담당 관원이 아뢰니 황제가 이르기를, '작은 나라에 감식할 사람이 없어서 잘못 옥이라고 한 것뿐이다. 또 사람은 물건을 소홀하게 여기지 아니하여 오직 그 물건을 덕되게 생각할 뿐이다. 만약 다시 물리친다면 무슨 예의이며 체통이겠느냐' 하였습니다." 하니, 왕이 듣고 부끄럽고 두렵게 여겨 낭중 박효진(朴孝縉)을 보내서 사의를 표하고 죄를 빌었다.

○ 망이(亡伊) 등이 홍경원(弘慶院)을 불태우고, 살고 있던 중 10여 명을 죽이며, 주지승(住持僧)을 협박하여 편지를 가지고 서울로 가게 하였는데, 그 대략의 사연에, “이미 우리 고을을 현(縣)으로 승격시키고, 또 수령을 두어 위안ㆍ무마하게 하였으나, 곧 다시 군사를 동원하여 와서 토벌하고 나의 어머니와 아내를 잡아 가두니, 그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차라리 칼날 아래에서 죽을지언정 끝내 항복한 포로는 되지 않겠고, 반드시 왕경(王京)에 이르고야 말겠습니다." 하였다.

○ 좌도병마사가 도적의 괴수 이광(李光) 등 10여 명을 사로잡았다.

○ 여름 4월에 의주(義州)ㆍ정주(靜州) 두 고을이 배반하니, 직문하(直門下) 사정유(史正儒)를 보내어 타일렀다.

○ 남적이 아주(牙州)를 함락시켰다. 그때 청주(淸州) 관내의 군ㆍ현이 모두 적에게 함락되고, 오직 청주만이 굳게 지키고 있었다.

○ 중방에서, 동북 양계(東北兩界)의 주(州)ㆍ진(鎭)의 판관은 무관으로 임명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기를 주청하니, 이를 청종(聽從)하였다. 이 논의를 주장한 자는 장군 홍중방(洪仲邦)이었는데, 무관 김돈의(金敦義) 등 6명이 중방이 나오기를 기다려 길을 가로막고 그 잘못을 호소하니, 중방(重房)에서 체포하여 묵형하고 섬에 귀양보내었다.

○ 안평공(安平公) 경(璥)이 졸하였다. 경은 성질이 안존하고 고요하며, 학문을 좋아하고 방기(方技 의술ㆍ점술 등의 기예)에 능통하였으며, 글씨와 그림을 잘하였다. 그러나 불교의 경전을 좋아해서 선승(禪僧)을 본받아 게송을 짓고 졸하였다.

○ 최기정(崔基靜) 등 35명과 명경(明經) 4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5월에 선지사용별감(宣旨使用別監)을 보내어 좌ㆍ우도 병마사의 남적을 제압 처치한 전공의 많고 적음을 심사 핵실하게 하였다.

○ 조서를 내려 충순현(忠順縣)을 삭제하였다.

○ 조위총의 나머지 무리 5백여 명이 반란을 일으켜 유수판관(留守判官) 박영(朴寧)과 처음에 항복을 청하였던 자를 죽였는데, 부유수(副留守) 박정희(朴挺羲) 사록(司錄) 김득려(金得礪) 등은 몰래 도피하여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이전에, 관군이 서경을 공격 포위했을 때에 성을 넘어와 항복한 자가 무려 천여 명이었다. 성이 함락되려 하자 성 안의 장정(壯丁)들은 모두 도피(逃避)하여 숨었는데, 그 뒤에 항복해 온 자들이 도피한 자를 반역하였다고 하여 그들의 부녀자를 아내로 약취(略取)하고 재산을 강탈하였으므로, 도피하였던 장정들이 난을 일으켜 이러한 변란에 이른 것이다. 대장군 이경백(李景伯)ㆍ낭중 박소(朴紹)를 보내어 타일렀다.

○ 내시낭장 겸 병부원외랑(內侍郎將兼兵部員外郞) 장보(莊甫)는 성질이 강정(剛正)하여 권귀(權貴)에게 아첨하지 않았다. 일찍이 내시장군(內侍將軍) 정존실(鄭存實)이 사람을 대하는 것이 교만하고 거만스러운 것을 면대(面對)하여 책망하였더니, 중방(重房)에서 듣고 장보가 장관(長官)을 능욕하였다고 탄핵하고 거제현령(巨濟縣令)으로 좌천시킬 것을 논의하였다. 보가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추밀원에 가서 원사(院使) 상장군 이광정(李光挺)과 부사(副使) 상장군 최충렬(崔忠烈)에게 말하기를, “가만히 들으니 공(公)들이 장보를 바닷가로 좌천시키고자 한다는데, 보에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하며, 말과 태도가 모두 거칠었다. 광정 등이 노하여 즉시 먼 섬으로 귀양을 보내고 몰래 사람을 시켜 강 속에 빠뜨려 버리니, 듣는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 6월에 금 나라의 횡선사(橫宣使)로 대부감(大府監) 도단량신(徒單良臣)이 왔다. 금 나라의 사신이 오게 되니, 나라에서는 서경(西京) 적의 잔당이 길을 방해할까 의심하여, “전란 뒤에 연로(沿路)에는 전염병이 크게 퍼졌다." 칭탁하고, 다른 길을 통하여 영접하기로 하였다. 곧 호부낭중 박소(朴紹)와 중랑장 아응시(牙應時)를 보내어 관군과 신기군(神騎軍) 80명을 거느리고 가서 뜻밖의 변고에 대비하게 하였다. 가다가 통덕역(通德驛 평남 숙천(肅川))에 이르니 과연 적(賊)이 갑자기 뛰어나와 습격하여, 죽은 자가 10에 8, 9나 되었으며, 박소도 살해되었다.

○ 신묘일에 태묘(大廟)에 벼락이 떨어졌다.

○ 망이가 사람을 보내어 항복하기를 청했다.

○ 가을 7월에 관군이 서적(西賊)과 싸워 패배하고 돌아왔다.

○ 왕이 친히 허물을 인책하고 자신을 꾸짖는 글을 지어 경령전(景靈殿)에 사죄를 고하였다.

○ 서적의 괴수 낭장 김단(金旦)이 항복을 청하므로, 조서를 내려 간곡하게 용사(容赦)하고 중사(中使)를 보내어 타일렀다.

○ 북로제치사(北路制置使) 이경백(李景伯)은 서북면병마사 두경승이 영청(永淸)에서 군사(軍事)를 서로 상의하고자 한다는 말을 듣고 기병 5백여 명을 보내어 맞이하게 하였다. 서적 김단 등이 복병을 배치하였다가 역로(驛路)에서 저격하니, 기병이 모두 몰살되고, 오직 낭장 고용지(高勇之) 등 10여 명만이 달아나서 화를 면하였다. 경승이 이미 길을 떠났다가 변(變)을 듣고 달려 돌아가 성에 들어 갔는데, 적(賊)이 쫓아갔으나 미치지 못하고 전리(電吏 고려시대 중서성 문하성과 서경 유수관 등에 두었던 이속)를 잡아 죽였다.

○ 병마사 정세유(鄭世猷) 등이 망이ㆍ망소이 등을 잡아 청주(淸州)의 옥에 가두고, 사람을 보내어 승첩을 보고하였다.

○ 초맹반(抄猛班)의 행수(行首) 이돈작(李頓綽)ㆍ김입성(金立成)을 보내어 서적을 토벌하였다.

○ 판태부사(判大府事) 염신약(廉信若)을 파면하였다. 먼저, 신약의 구업전(口業田)이 봉성현(峯城縣 경기 파주(坡州))에 있었는데, 정중부가 빼앗았다가 조금 뒤에 돌려 주었다. 가을에 이르러 신약이 종을 보내어 수확했는데, 중부의 집 종이 마중나와 빼앗으므로 서로 싸웠다. 중부가 사람을 보내어 신약의 종을 체포해서 가구(街衢)의 옥에 넣어 죽이고, 드디어 중방에 고하여 신약을 탄핵하니, 왕이 부득이하여 신약을 파면하였다.

○ 8월에 오군별호(五軍別號)를 보내어 서적을 토벌하였다.

○ 석린(石麟)을 서북로 지병마사로 삼았다. 그때 이경백이 두경승과 함께 화합하지 못하여 싸움이 자주 불리하였으므로, 경백을 불러들여 석인으로 대신하게 하고, 경승에게 처치사(處置使)를 겸하게 하였다.

○ 남로착적병마사(南路捉賊兵馬使) 양익경(梁翼京)이 돌아왔다. 익경은 가는 곳마다 탐오(貪汚)하고 방종하니, 아전과 백성이 고통을 이길 수 없어 모두 도적보다 피해가 더 많다고 하였다.

○ 금 나라의 사신이 돌아갔다. 그때 서적(西賊)이 길을 막았으므로, 임진(臨津)을 건너 춘주(春州)의 경계를 경유하여 정주(定州 함남 정평(定平))에 이르러서 관문을 나갔다. 춘주부사(春州副使) 최충필(崔忠弼)이 접대한다는 핑계로 걷어들인 것이 너무 심하여 이로 인해 파면되었다.

○ 서북로에서 도적의 괴수 김단(金旦) 등 5명의 머리를 베어서 함에 넣어 서울로 보내 왔다.

○ 중서시랑 평장사로 퇴직한 한취(韓就)가 졸하였다. 취는 점술(占術)에 능통하여 능히 사람의 화복을 예언하였는데, 경인년의 난에도 지혜로써 몸을 보전하였다.

○ 9월에 상장군 이의민(李義旼)을 보내어, 8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서적을 토벌하게 하였다.

○ 서적(西賊)이 서경의 담화사(曇和寺)에서 향산(香山)으로 옮겨 주둔하였다.

○ 겨울 10월에 궁궐도감(宮闕都監)과 시가의 상점 38간이 화재를 당하였다.

○ 서적의 괴수 강축(康畜) 등 3명이 와서 항복하였다. 모두 교위(校尉)를 제수하고 돌려 보내어 나머지 도당에게 항복하도록 타이르게 하였다.

○ 11월에 낭장 최미(崔美)를 금 나라에 보내어 횡선사(橫宣使)를 보내 준 것을 사례하게 하고, 내시원외랑 최정(崔貞)에게 생일을 축하한 것을 사례하게 하고, 예부원외랑 손응시(孫應時)는 신년을 축하하게 하였다.

○ 서적의 괴수 조충(曹忠)이 항복해 왔다.

○ 남적제치병마사(南賊制置兵馬使) 이부(李夫)가 돌아왔다. 부는 군사를 통솔하는 것이 엄정하니, 가는 곳마다 사졸의 마음을 얻어 여러 번 싸움에 다 승리하였으므로, 도적이 숨을 죽였다.

○ 12월에 서북면 병마사 최우청(崔遇淸)이 정주(靜州)의 도령(都領) 순부(純夫)와 낭장 김숭(金崇)을 베어 죽였다. 순부 등이 여러 번 반역을 꾀하였으나 국가에서 고식책(姑息策)으로 토벌하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우청이 고을 사람을 달래어 그를 죽이게 하였던 것이니, 왕이 조서를 내려 표창하였다.

댓글 2

새회사 · 투********

어쩌라규???

대구교통공사 · 포******** 작성자

그냥 심심풀이 땅콩으로 읽을거리 공유했슴돠😄😄

인기 채용

더보기

토픽 베스트

스포츠
자기계발(변화의 기록)
내가그린 그림 취미그림🎨
음악게시판
탐조 생활
대구경북 이야기🌟
주식·투자
프로N잡러
나들이 명소
송파꿀맛탐험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