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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거란전쟁 30,31,32화 스포

대구교통공사 · 포********

○ 내사시랑 평장사 강감찬(姜邯贊)을 서북면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삼았다.

○ 무술일에 거란의 부마 소배압(蕭遜寧)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침략하면서 군사 10만 명이라고 소리쳤다. 왕은 평장사 강감찬을 상원수(上元帥)로, 대장군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군사 20만 8천 3백 명을 거느리고 영주(寧州 평남 안주(安州))에 주둔하게 하였다. 흥화진에 이르러 기병 1만 2천 명을 뽑아 산골 속에 매복시키고 또 큰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큰 냇물을 막아두고 적을 기다렸다가, 적이 이르자 막은 물을 터 놓고 복병을 내어서 적을 크게 패퇴시켰다. 배압이 군사를 이끌고 바로 서울로 들어오자 민첨이 자주(慈州) 내구산(來口山 평남 순천(順川))까지 뒤쫓아 와서 적을 크게 패퇴시키고, 시랑 조원(趙元)이 또 마탄(馬灘)에서 적을 쳐 머리 1만여 급을 베었다.

○ 갑인일에 서울(개경)을 엄하게 경계토록 하였다.

○ 봄 정월 경신일에 강감찬이, 거란 군사가 서울에 가까이 오므로 병마판관 김종현(金宗鉉)을 보내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걸음을 배로 늘려 서울에 들어와 방위하고, 동북면 병마사 역시 군사 3천 3백 명을 보내 들어와 구원하였다.

○ 신유일에 소배압이 신은현(新恩縣 황해 신계(新溪))에 이르니 서울과의 거리가 백 리였다. 왕은 성밖의 민호를 전부 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들판의 작물과 가옥을 철거하여[淸野] 적군을 기다리도록 명하였다. 배압이 야율호덕(耶律好德)을 보내어 서신을 가지고 통덕문(通德門)에 이르러 군사를 돌이킨다고 알리고는, 몰래 척후 기병 3백여 명을 보내어 금교역(金郊驛 황해 김천(金川))에 이르니 우리 편에서 군사 1백 명을 보내어 밤을 타서 습격하여 죽였다.

○ 신사일에 거란이 군사를 돌려 연위주(漣渭州 연주(漣州)는 평남 개천군(价川郡) 위주(渭州)는 평북 영변군(寧邊郡))에 이르니 감찬 등이 습격하여 머리 5백여 급을 베었다.

○ 2월 초하루 기축일에 거란 군사가 귀주를 지나니 감찬 등이 동쪽 들에서 맞아 크게 싸웠는데 양편의 군사가 서로 버티어 승패가 결정되지 않았다. 김종현이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러 왔는데 갑자기 비바람이 남쪽에서 불고 깃발이 북쪽을 가리키자 우리 군사가 형세를 타서 분발하여 치니 저절로 배로 용기가 났다. 거란 군사가 패하여 북쪽으로 도망하니 우리 군사가 뒤쫓아 쳐서 석천(石川)을 건너 반령(盤嶺)에 이르렀다. 죽어 넘어진 시체가 들판을 덮고, 사로잡은 군사와 말ㆍ낙타ㆍ갑옷ㆍ투구ㆍ병기는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었으며, 살아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뿐이었으니, 거란 군사의 패전함이 이때와 같이 심한 적은 없었다. 거란주가 소식을 듣고는 크게 노하여 사자를 보내어 손녕에게 꾸짖기를, “네가 적을 깔보고 깊이 들어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볼 것이냐. 짐이 마땅히 네 낯가죽을 벗긴 후에 죽일 것이다." 하였다.

○ 갑오일에 삼군(三軍)이 개선하여 돌아와 포로와 전리품을 바쳤다. 왕이 영파역(迎波驛)에서 친히 맞이하여 채붕(綵棚)을 설치하고 음악을 갖추어 잔치를 베풀고 장사들에게 물품을 내려주었다. 왕이 금화(金花) 여덟 가지[枝]를 친히 감찬의 머리에 꽂아 주고, 오른손으로 금술잔을 들고 왼손으로 감찬의 손을 잡고는 위로하고 감탄하기를 마지않으니 감찬이 배사(拜謝)하면서 감히 받지 못하였다. 마침내 영파역(迎波驛)을 흥의역(興義驛)이라 고치고, 역리(驛吏)에게 관대(冠帶)를 내려주어 주ㆍ현의 이(吏)와 같게 하였다.

○ 장수들을 명복전(明福殿)에 모아 잔치를 베풀고 아울러 삼군을 위로하였다.

○ 강감찬이 표문을 올려 퇴직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几杖]를 내려주었다.

○ 문하시중 유진(劉瑨)이 졸하였다. 유진은 충주(忠州) 대원현(大原縣) 사람이다. 후비(后妃) 중에 유씨(劉氏) 성을 가진 이는 모두 그의 종족에서 나왔으므로 대대로 척리(戚里)가 되었다. 사람된 품이 청렴 결백하고 풍채가 아름다웠다. 광종 때부터 항상 근시(近侍)의 직에 있고 일찍이 외직으로 임명된 적이 없었다. 비록 임금을 잘 보좌한 것은 없었으나 자못 대신의 여망을 얻었다.

○ 양규(楊規)와 김숙흥(金叔興)에게 공신 녹권(功臣錄券)을 내려주었다.

○ 겨울 11월에 강감찬(姜邯贊)을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 천수현 개국남 식읍삼백호(檢校太尉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天水縣開國男食邑三百戶)로 봉하였다.

○ 12월 초하루 계미일에 왕자 서(緖)가 태어났다. 그가 훗날 47년간 재위하며 고려 최전성기를 이룩한 해동천자 문종이다. (현종-덕종-정종-문종)

○ 최사위(崔士威)를 추충 좌리 동덕공신 청하현개국남 식읍삼백호(推忠佐理同德功臣淸河縣開國男食邑三百戶)로, 강감찬을 추충협모 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으로, 유방(庾方)을 추성 좌리 보국공신천승현개국남식읍삼백호(推誠佐理輔國功臣千乘縣開國男食邑三百戶)로, 채충순(蔡忠順)을 추충 진절 위사공신 제양현개국남 식읍삼백호(推忠盡節衛社功臣濟陽縣開國男食邑三百戶)로, 강민첨(姜民瞻)을 추성치리 익대공신(推誠致理翊戴功臣)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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